벨라뎃다의
부모는 너무 가난하여 자녀들을 제대로 교육하고 양육할 형편도 못되었다. 소유하고 있던
중요한 생계 수단이었던 방앗간마저 빚 때문에 저당 잡혀서 그야말로 끼니도 잇기 어려울
정도의 생활을 꾸려 가고 있었다. 동생이 태어나서 벨라뎃다는 이웃 마을의 아기를 잃은
집에 얹혀서 15개월이나 살다가 온 적도 있었다. 벨라뎃다는 그런 집의 맏딸이었다.
또한 태어날 때부터 병약했던 벨라뎃다는 그녀의 일생 동안 고통을 주었던 천식을 앓고
있었다. 워낙 가난한 집이라서 겨울철이면 제대로 난방이 안되어 그녀는 보다 난방이
잘되는 이모 집에서 겨울을 나기도 하였다.
발현 첫날의 상황은 그녀가 발현 전체를 기술하도록 요청하여 이를 꼼꼼히 잘 기록했던 에스뜨라드의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재의 수요일 전 주의 목요일(1858년 2월 11일을 말함)이었는데 날씨가 대단히 추웠습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어머니께서 저희들에게 집에는 더 이상 땔나무가 없다며 걱정을 하셨습니다. 여동생 뜨와네뜨와 저는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려고 강가에 있는 마른 나뭇가지를 주으러 가겠다고 했습니다. 어머니께선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날씨가 좋지 않아서 잘못하면 가브 강에 빠질지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이웃 친구인 잔느 아바디가 우리 집에 남동생을 찾으러 왔는데 우리와 같이 가겠다며, 남동생을 집에 데려다 두고 다시 와서 우리와 가겠다고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여전히 망설이셨지만 세 명이니까 가도 좋다고 하셨지요.
우리는 처음엔 잔 나뭇가지들이 종종 발견되던 공동묘지로 가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 날따라 그 곳에선 아무것도 발견을 못했습니다. 그래서 가브 강 근처까지 가는 옆길로 갔고 뷔예 다리에 도착해서는 강을 따라 올라 가는 것이 나을지 내려가는 것이 나을지 고심했습니다. 우리는 일단 내려가기로 마음먹고 산길을 따라 메라스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사비 방앗간 옆의 무쉐 드 라 피트의 농지로 들어갔습니다. 이 농지의 끝은 마사비엘 동굴 맞은편인데요,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방앗간 수로가 있어서 우리는 멈추어야 했습니다.
수로의 물살이 방아를 돌릴 정도로 세지는 않았지만 물이 너무 차가워서 저는 들어가기가 두려웠습니다. 잔느와 제 동생은 저보다는 덜 소심해서 신발을 벗어 손에 들고 물을 건넜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건너편에 가서는 물이 차갑다고 소리 지르며 허리 숙여 손으로 문질러 발을 녹였습니다. 모든 것이 겁만 더 주게 되어 제가 물 속에 들어가면 틀림없이 천식이 재발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보다 덩치도 크고 힘이 센 잔느에게 업어서 건네 달라 부탁을 했습니다. 그녀는 "싫어! 못 오겠으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은 동굴 밑에서 나무 조각 몇 개를 집어 들고는 가브강을 따라 사라져 버렸습니다. 혼자 있게 되자 징검다리를 만들고자 돌멩이를 물 속에 몇 개 던져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잔느와 여동생이 했던 것처럼 물을 건너려고 신발을 벗기로 했습니다.
양말을 막 벗으려는 순간 갑자기 폭풍우 같은 큰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오른쪽, 왼쪽 그리고 강가의 나무 밑을 보았지만 아무것도 움직이는 것이 없었습니다. 잘못 들은 것이라 생각하였죠. 계속하여 양말과 신발을 벗을 때 첫 번째와 같은 맑은 소리가 들렸습니다. 너무 놀라서 꼿꼿하게 서 버렸습니다. 동굴 쪽으로 머리를 돌려보니, 마치 센 바람이 불듯이, 동굴 입구의 덤불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는 생각하고 말할 기력도 잃어 버렸습니다.
거의 동시에 동굴 안에서 금빛 구름이 나왔고 잠시 후 젊고 아름다운, 지금까지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은 본적이 없는, 정말 너무도 아름다운 여인이 나와서 입구의 장미 덤불 위에 서 있었습니다. 그 분은 저를 보고서는 미소를 짓고 가까이 오라 하였습니다. 마치 저의 어머니처럼. 모든 두려움은 사라졌지만 이제는 제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가 되어 버렸습니다. 눈을 비비면서 떴다 감았다 해보았습니다. 그 여인은 계속 미소를 지으며 제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손에 로사리오를 꺼내 들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 여인은 머리를 끄덕이며 승락의 표시를 했고 그 분도 오른 팔에 걸치고 있던 로사리오를 손에 들었습니다. 로사리오 기도를 하려고 손을 이마에 대려고 했지만 팔이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 여인께서 성호를 긋고 나서야 저도 같이 따라서 할 수 있었습니다. 그 여인께선 제가 혼자 기도하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 분은 손가락 사이에서 로사리오를 만지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한 단이 끝날 때마다 저와 함께 영광송을 했죠.
로사리오가 끝났을 때 그 여인은 동굴 안으로 들어갔고 금빛 구름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그 여인은 16세에서 17세 정도의 젊은 아가씨였으며 흰 옷을 입고 있었고 허리 부분에 겉옷 밑단까지 흘러내리는 푸른 색 띠를 매고 있었습니다. 흰 색 면사포를 머리에 쓰고 있었는데 그 면사포 안에는 허리 뒤까지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이 엿보였습니다. 신발을 신지 않고 있었는데 발까지 내려 온 겉옷이 발을 덮고 있었으며 겉옷이 겹쳐진 단에는 노란 색 장미가 빛나고 있었습니다. 발에 꾸며진 장미의 빛깔처럼 금색 고리로 연결된 흰 로사리오를 오른팔에 들고 있었습니다.
그 분이 사라지자마자 잔느와 여동생이 동굴로 돌아와서는 제가 그들이 떠난 장소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녀들이 저를 바보라고 놀렸습니다. 그리고는 같이 돌아갈 것인지 아닌지 물어 보았습니다. 이제는 물을 건너는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물이 마치 설거지 할 때의 것처럼 따뜻했습니다. 발을 말리면서 잔느와 여동생 마리에게 '그렇게 떠들 필요 없어. 너희들 생각처럼 물이 차갑지가 않아.' 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차갑지 않다니 다행이구나. 얼마나 차가웠는데.' 하는 것이었지요.
잔느와 마리에게 혹시 동굴에서 이상한 것을 못 보았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들은 '아니.' 했지요. '왜 그러는데?' 하고 물어 왔지만 '아무 것도 아니야.' 라고 퉁명스럽게 답했습니다. 그러나 집에 도착하기 전에 잔느와 마리에게 비밀로 해 달라며 동굴에서 생긴 이상한 일을 이야기하고 말았습니다.
온 종일 그 여인의 모습이 머리 속에 맴돌았습니다. 저녁에 기도하면서 걱정이 되어 울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어머니께서 이유를 물어 보셨고 마리가 대신 대답했고 저도 그날 있었던 일들을 말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어머니께선, '환영이야. 그런 생각은 더 이상 하지 말고 이제는 마사비엘에는 가지 말아라.' 하셨습니다. 침대에 들어가서도 잠이 오질 않았습니다. 그 여인의 얼굴은 너무 멋있고 인자하셔서 줄곧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어머니가 하신 말씀은 소용이 없었습니다. 제가 헛것을 보았다고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첫날 발현의 이야기를 벨라뎃다는 위와 같이 시간에 따라 상세히 묘사를 하였다. 그리고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에 금요일과 토요일은 동굴에 가지 않았지만 동굴로 가서 자기가 본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그 아름다운 여인을 또 만나고 싶어 하는 마음이 갈수록 강하여졌다.
일요일이 되어 벨라뎃다는 잔느와 마리가 같이 가니 보내 달라고 어머니께 사정하였다. 처음엔 완강히 반대하던 어머니도 승낙을 하였고 셋은 떠나면서 작은 병에 성수를 담아 가기로 하였다. 어른들의 생각처럼 악마의 소행이라면 성수를 뿌려서 막아낼 작정이었다.
벨라뎃다는 그간 집 밖에선 입을 다물었지만 동생 마리가 호들갑을 떨며 소문을 내버리는 통에 친구들이 자기들도 따라 가겠다며 나섰다. 친구들이 새 옷으로 갈아 입는 동안 기다려 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잔느와 마리는 뒤에 오기로 했고 벨라뎃다가 가장 먼저 동굴 앞에 도착했으며 곧 무릎을 꿇고 기도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곧 "저기에 계셔! 저기에!" 라고 소리 지르며 친구들을 불렀다. 그녀의 친구들이 무엇인가를 찾아보려고 살폈지만 별 다른 것이 없었다. 한 친구가 말했다. "그 여자에게 뿌려!" 친구들이 본 벨라뎃다는 성수를 뿌리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들고서 땅에 붓는 것이었다. 여인이 미소 짓는 것을 보고 벨라뎃다는 친구들에게 그 여인이 성수 뿌리는 것에 대해 즐거워한다고 전해 주었다. 그리고는 무아경에 빠져 버리고 한 지점만 계속 응시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행복감으로 가득 찼으며 그 표정은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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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남서부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주(州) 오트피레네현(縣)에 있는 소도시.
루르드는 프랑스 남쪽의 국경을 막은 피레네산맥의 산록에 위치하고 있는 작은 마을이다. 본래 세상에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1858년 2월 11일 이후 수십 회에 걸친 성모 마리아의 발현이 있은 이후로 일약 세상에 유명해졌다. 그 마을의 교외에 있는 가르와리아라는 산록을 따라 가브강이 흐르고, 그 중간에는 샬레섬이 있어서 강물을 두 갈래로 나누고 있지만, 그것이 다시 합류되는 곳에 큰 절벽이 있고 그 가운데 마사비엘이라고 부르는 굴(洞穴)이 있다. 이곳이 성모께서 발현하신 성지이다.
그것은 교황 비오 9세가 성모 무염시태를 새 신덕도리로 반포하신 후(1854년 12월) 3년 2개월 째 되는 날이었다. 가난한 물방앗간 집에서 출생한 벨라데따라는 13세의 소녀가 강을 건너 마싸비엘 부근에 가서 땔나무를 하기 위하여 흘러 내려온 나무를 한참 줍고 있을 때 돌연 큰바람이 불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매우 놀라 뒤를 보니까 마침 굴속에 아름답고 어여쁜 한 부인이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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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몸에 백설과 같은 흰옷을 입고, 허리에는 하늘색의 띠를 두르고 손에는 백주금쇄(白珠金鎖)의 묵주를 들고, 깨끗한 맨발로는 두 장미꽃을 밟고, 눈은 황홀하게 하늘을 우러러보고 계셨다. 벨라데따는 그이가 누구이신가를 아직 모르며 다만 그 아름다운 모습에 도취되어 마음속에 무한한 즐거움을 느끼고 자기도 모르게 묵주를 꺼내어 같이 기도를 바치고 영광송이 끝나자 그 귀부인의 모습은 사라졌다. 그 후 벨라데따는 집에 돌아와서 양친과 본당 신부께 그 이야기를 하였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다.
2월 14일 벨라데따는 그 귀부인에 대한 정에 못 이겨 재차 마사비엘을 방문하였다. 그는 예상한 대로 또 귀부인의 발현을 보았지만, 그의 모습은 호기심으로 그를 따라간 다른 사람에게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들은 그때의 벨라데따의 탈혼상태에 놀라 그와 소리를 합쳐 묵주기도를 바쳤던 것이다. 이러한 귀부인의 발현은 2월 11일부터 7월 16일 갈멜산의 성모의 축일까지 18회나 되었다. 혹은 호기심으로 혹은 신앙심으로 벨라데따를 따라 동굴에 가는 사람은 점점 증가하여 종종 수백만 명에 달한 때도 있었다.
3월 25일 성모 영보축일에 16회 째 귀부인의 발현을 본 벨라데따가 "오, 부인이여! 당신은 누구시며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옵니까?"하고 여쭈어 보니까 귀부인은 하늘을 우러러보시면서 "나는 원죄 없이 잉태된 자"라고 명백히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벨라데따에게 발현하신 분이 성모 마리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보다 먼저 성모 발현의 목적에 대하여 벨라데따에게 "여기에 성당을 세우고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모이는 것을 원한다는 것을 사제에게 말하라"고도 분부하셨고, 또 "죄인의 회개를 위하여 기도하라"고도 명령하셨으며, 다시 벨라데따 개인에 대해서는 "나는 반드시 너를 행복하게 하여 주리라. 그러나 그것은 이 세상에서가 아니라 저 세상에서이다." 하고 고마운 약속을 하셨다고 한다.
2월 25일 9회째 발현에서는 "샘의 물을 마시고 세수를 하여라"고 명령받았다. 벨라데따는 샘 같은 것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손짓한 곳을 손으로 파보니까 과연 물이 솟아났다고 한다. 이것이야말로 후에 많은 병자를 영적으로 낫게 하고, 매일 12만2천4백 리터의 물을 내게 하는 루르드의 영천(靈泉)의 시작인 것이다.
이 영천의 난치병에 대한 효능은 실로 놀랄만한 것으로써 지금까지 영수(靈水)를 마시고 혹은 몸을 씻음으로써 아주 희망이 없었던 병자가 완쾌된 예는 얼마나 되는지 모를 정도이다. 1861년까지 3년 동안에 이미 100건 가량의 완치 사례가 있었고, 의사단(醫師團)의 엄밀한 조사에 의해서도 "그 중의 15건은 적어도 인간의 지식을 초월한 기적이다." 하고 결정되었던 것이다.
7월 16일 최후의 발현이 있은 후 그 교구의 주교는 신학자, 과학자, 의학자 등으로 구성된 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발현의 사건에 대하여 충분한 신학적․과학적인 조사를 하도록 명하였는데, 그 결론은 각 위원 모두 자연적인 현상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고 초자연적인 현상이라고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에 일치하였다.
이와 같은 기적이 세상에 알려짐에 따라 루르드에 순례하는 자는 날이 갈수록 증가되었다. 프랑스 국내는 물론 멀고 먼 외국에서도 개인으로 혹은 단체로 이 성지를 방문하고 그 동굴 앞에 무릎을 꿇고 성모의 전달을 간구했으며 영육간 많은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고 그 영수(靈水)의 효능으로 난치병을 회복한 자도 그 수를 모를 정도로 다수에 달하였다.
리용시의 한 조각가 파비슈는 벨라데따에게 발현하신 성모 마리아 모습을 조각하여 그것을 [마사비엘]의 동굴 안에 안치하고 1864년 4월 4일 그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오늘까지 세상에 유명한 루르드의 성모상은 바로 이것이다.
루르드의 성모의 전달로 은혜를 받은 신자들 중에는 감사의 헌금을 한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한 헌금으로 성모의 원의대로 그곳에 건립된 화려한 성당은 1876년 7월 2일 축성되었다. 그 후로 그곳을 참배하는 순례자는 한층 더 많아져 매년 평균 60만명인데, 1933년의 발현 75주년에는 실로 150만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병자의 완치는 모두가 기적이라고 할 수 없지만, 루르드 의국조사위원(醫局調査委員)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최초의 55년 동안에 기적이라고 인정되는 것이 4,445건이나 된다고 한다. 또한 루르드를 순례하는 병자가 모두 다 완치된다고는 할 수 없지만 누구든지 많은 위안을 얻어 병고를 잘 참게 된다는 것은 일반이 인정하는 바이다. 성모상은 성모님께서 나타나셨던 바로 그 모습이며 또 바로 그 같은 장소에서 성모님께서는 피레네 방언으로 "나는 원죄 없이 잉태된 자"라고 말씀하시면서 벨라데따에게 자신의 신분을 알려주셨다.
제대 왼쪽 동굴 안에 자물쇠로 잠겨진 돌판 아래에는 1858년 2월 25일 9번째 발현 당시의 성모님의 말씀에 따라 벨라데따가 땅을 파헤쳤을 때 솟아올랐던 샘이 있다. 이 샘의 물은 몇 개의 큰 저수통에 저장되어서 목욕하는데 공급이 되고 또 우리가 마실 수 있도록 된 샘에도 공급된다. 샘 왼쪽에 대리석 판이 있는데 그 위에 성모님께서 벨라데따에게 여러 번 발현 당시에 하신 말씀이 적혀 있다. 그 말씀은 중요한 메시지로서 우리들 각자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가브강을 따라 동굴을 지나가면 많은 순례객들이 들어갈 수 있도록 1955년에 다시 지어놓았던 건물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목욕실로 지어진 건물이다. 여기서 병자나 건강한 이들 모두 목욕을 할 수 있도록 초대되고 있으며 수많은 이들이 아침 9시부터 11시까지 그리고 오후 2시 30분에서 4시까지 목욕물에 들어간다.
맨 위에 지어진 대성당은 이미 알려진 것처럼 "여기에 성당을 짓도록 하라"고 하신 성모님의 요청에 의해 지어진 것이며 그 성당의 제대가 바로 성모님 발현 장소의 위쪽에 위치하고 있다. 그래서 이 대성당은 출구가 왼쪽에서 시작된 것이다. 성당 양쪽의 유리문은 발현 당시부터 1876년 루르드 성모상 하관의 역사까지 계속 보여주고 있으며 또 좀더 위쪽 유리문들은 세상 태초부터 비오 9세까지 정식 [교의]로서 발표하시기까지의 성모 무염시태 신비를 상기시켜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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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1,530m의 거리를 두고 언덕 위에 십자가의 길이 만들어졌다. 각처마다 쇠로 조각된 2m 높이의 상들이 있다. 누구나 이 언덕의 십자가의 길을 방문하면서 대사를 얻고 은총의 상태에서 거룩한 십자가의 고통을 묵상할 수 있다. 순례객들의 편의를 위해 왼쪽에는 기도문이 새겨져 있다. 또 한편 병자 순례단을 위한 십자가의 길이 마련되어 있는데 그것은 가브강을 따라 목욕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고 1963년 3월 25일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 십자가의 길은 합당한 고백을 할 수 있도록 잘 준비시켜 준다.
여름에는 항상 문이 열려 있는 이 성당은 50개의 고해소가 있고 각 나라에서 오신 신부님들께서 각 나라 말로 고해성사를 주는 기회를 마련하고 있다. 바른쪽 경사지 위에 자리잡고 있는 이 사무실은 불치병 완치에 대한 연구나 교회에서 인정된 기적에 관한 순례객의 질문에 대한 안내의 역할을 하는 일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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